후대(後代)가 교훈(敎訓)으로 삼아서 근신(勤愼)하므로
나찰(羅刹)이 되거나
허깨비라는 귀신(鬼神)이 되지 말기를 간절(懇切)히 빈다.
1976년 4월 18일 밤에 아무도 몰래 대구(大邱)로 피신(避身).
동대구 고속터미널 부근 성도여관에서
강경자 선생을 불러 사후(事後)를 논의하고
백칠복 선생의 요청에 의해 곽길태 선생 집으로 은신.
경남 마산에 있던
김재호를 제일 먼저 불러 사태의 경위를 설명함.
1976년 6월 20일 19일 치열(熾熱)하게 불길이 일어 전국으로 번지자
급거(急遽) 상경(上京)하여 대책(對策)을 숙의(熟議).
1976년 7월 21일 뇌부(雷部)의 천라지망(天羅地網)에 봉인(封印)됨.
1976년 7월 30일 금요일 아침 7시 강경자 선생
서대문에 있던 여관에서 병원으로 이송.
유언장(遺言狀) 발견(發見).
1976년 8월 10일 김재호와 결연(結緣)을 맺은 후(後)
일단,
어떠한 일이 있어도
김OOOO병보석(病保釋)을 추진(推進)하기로 약속하고,
대구(大邱) 권화조(權華祖) 선생의 중학교 교사시절
국어 제자인 부로커 장두운(張斗云)의 천거(薦擧)로
한봉세 변호사(辯護士)
입갑인 변호사(辯護士)
전주(全州)에서
송도현 선생이 추천한 윤용섭 변호사(辯護士)등
변호사(辯護士) 셋을 동시(同時)에 선임(選任)하고
2차(二次) 구명운동(救命運動에 돌입(突入).
병보석(病保釋)이 될 때까지 들어 간 돈이
당시 돈으로 중소도시에서 집 한채에 100만원 정도할 때
구명운동(救命運動)에 총액 3억 7천만원이 사용(使用)됨.
이 일은 대구(大邱),
권화조(權華祖) 선생,
백칠복(白七福) 선생,
김숙자(金淑子) 선생 등이
생생하고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O O O O이
병보석(病保釋)으로 석방(釋放)이 되자,
박나찰(朴羅刹)은
나찰굴(羅刹窟)을 설치(設置)하고
나찰귀사(羅刹鬼事)를 전횡(專橫)하기 위해서,
어떠한 경우(境遇)라도,
김재호와 강경자가
김O O O O의 곁에
가까이 못오게 하거나 나타나지 못하게 하려고,
박나찰(朴羅刹)과
나찰귀(羅刹鬼)의 졸개들이,
도리혀,
김재호와 강경자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름.
이상과 같은 일은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되어,
미수(未遂)에 그친
강경자선생 유언장(遺言狀)과 함께
도서관(圖書館)에 보관(保管)되어 있다.
이러한 일을
세간(世間)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던가?
세간(世間)에서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말할 때,
물에 빠진 사람 건져서
살려주니까
내 보따리 내놓아라 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행태(行態)를,
은혜(恩惠)를
원수(怨讐)로 갚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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